예술과 인생, 그리고 파계

"파계" 계율을 깨뜨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 계율은 깨뜨리기 지극히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여기에는 아무나 파계의 경계를 넘나들지 못하는 범상하지 않은 표현이 담겨 있기도 하다.

우리의 일상은 주어진 상황에서 현상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정형화된 형태로 안식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틀을 고수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 합리적인 사고로 해서 적당히 타협하고나서 보편타당한 삶의 한쪽을 선택한 범인(凡人)의 타성을 연출하는 작업, 일상적인 작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의식의 저점(底店)에서 머물러 버리고 만다.

'파계'라는 단어는 어쩌면 특별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일상의 범주를 조금만 벗어나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옛 성현들의 '파계'의 행적은 가장 인간적이고 그리고 자연의 질서를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종종 보게 된다. 예수가 실로암에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우리는 예사롭지 않게 보게 된다. 율법을 중시하는 그가 히브리인들에게는 당시로서 대단한 사건 그 자체였음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은 기실 대단한 '파계'의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믿음으로 덮으며 안식일의 의미를 인간이 지닌 마음의 평화에서 찾아낸 예수의 행위는 장님의 마음 속에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중 가장 인간적이고 그리고 자연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거대한 자연의 모습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또한 신라의 고승 원효가 요석공주에 대한 파계도 앞서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유혹이나 자신의 욕망에 대한 탐닉이 아닌 요석공주에 대한 구원의 행위이자 자신의 구도에 대한 하나의 화두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행한 '파계'는 보다 본질적인 화두에 다가간 접근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얻게 된 번뇌와 파계의 아픔에서 진정한 부처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달은 원효의 행위에서 '破는 도의 첩경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새김질하게 한다.

그러나 도는 아무나 깨닫는 것이 아님을 역사 속에 드러난 선현들의 여러 흔적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큰 사람이 행하는 '破'는 거듭남을 의미하고 그것은 햇빛이 사물에 고루 이롭게 비치듯 많은 사람들에게 자양분이 되지만 도에 이르지 못한 소인의 '破'란 일종의 방종이며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것들을 다치게 하는 전락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의 계율을 파계하는 것은 성인들이나 행할 수 있는 경계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서의 파계란 무엇인가? 예술이라는 커다란 터널을 지나기 위해 스스로 굴파기를 시작하여 실험하고 모색하고 깨뜨려 보지만 굴레의 완성만을 이름지을 뿐 내면의 그 무엇을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예술에서나 일상사에 있어서도 길이 아닌 길을 간다는 것, 그것만큼 두렵고 어려운 것이 없으리라. 더더욱 미지의 길은 두렵고 무섭기만 하다. 더구나 내게 속한 굴레를 깨뜨리며 나아간다는 것. 그 깨어짐의 첫 걸음은 아픔이고 그리고 고통이기도 하다. 다시 되돌아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러나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것이 타고난 끼, 즉 예술의 길임을 어쩌랴. 그래서 나 자신을 안주의 평야지대로 몰기보다는 험한 길이지만, 안식할 수 없는 길이지만 늘 깨어지기 위해 각박한 화가의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집을 나설 때의 첫 길은 지금 생각해도 늘 한 편의 동화를 연상시킨다. 오래 전에 읽었던 '트리나포올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온 갓 태어난 작은 애벌레가 성장해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애쓰고, 덧없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상처받고 사랑하는 또 다른 애벌레를 버렸지만 끝내는 자신을 버림으로써 그들이 지향했던 저 높은 세계, 즉 나비의 세계를 찾아가는 그 작은 이야기에서 나는 진한 감동을 받았었다. 자신의 죽음없이 절대로 접근할 수 없었던 나비의 세계는 거듭남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진정한 '파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깨뜨리는 거듭남이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경계가 됨을 그곳에서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하나의 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신의 껍질을 깨야만, 그 아픔을 비로소 겪어야만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환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픔은 잠시 지나가는 아픔이 아니다. 생살을 찢어내는 아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안타까움. 뼈를 깎아내는 고통이어야 한다. 그러한 아픔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아픔을 요구하고 있다. 싫든 좋든 이 아픔의 껍질을 깨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현실의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의 '破'를 거듭남의 거름으로 쓰고자 할 때 그것은 지혜가 되고 행복의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이치는 하나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생활에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결코 다를 수 없는 진리이기에 나는 "그림은 곧 인생이다"라고 역설하곤 한다. 내게 있어 그림을 빼고 나면 그것은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껍질을 찢고 벗어 나오기 위한 몸부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를 비상을 늘 꿈꾸기에 그다지 외롭지 않은 '예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