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과 두터움을 찾는 선인의 마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1-23 15:00     조회 : 5975     밝음과 두터움을 찾는 선인의 마음 -임효의 근작에 부쳐- 이 종 숭(미술평론가) Ⅰ. 임효의 작품들을 보면서 짚어낼 수 있는 몇가지 인상은 결코 지나친 하강직 무게의 거추장스로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부유(浮遊)하는 가벼움의 풍만함도 아니다. 그의 작품들로부터 우리는 붓놀림에 있어서 짜맞추어진 인위적인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구축적인 요소를 볼 수 없고, 단순히 인간의 내면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의식을 보여주는 추상적 충동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혹은 미래에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한 자연은 모든 삶의 바탕을 넉넉하게 감싸고 있는 자연과의 합일을 밝고 두텁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가 임효이다. 그는 생명의 시원(始原)과, 그곳에서 생명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대한 탐색을 독특한 매재적 속성과 이에 조응하는 활력있는 조형적 변주로 이루어내고 있다. Ⅱ. 과거의 임효의 작품들이 주로 한국의 고유한 정신적 원형으로서의 역할을 잃어가는 신화에 대한 탐색을 대담한 조형어법으로 그려냈다면, 현재의 그의 작품들은 과거보다 한층 밀도있는 내용과 형식으로 전환해가고 있다. 그것은 그가 비가시적이지만 좀더 본질에 다가서는 것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그것은 시각적인 면에 있어서의 보는 감흥과 즐거움에 대한 새로운 작가의 적극적인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임효의 최근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정서의 움직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일단 어느 정도 유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의 그의 작품 속에서 그의 의식이 작품 속에 함몰하기도 하고, 때로 그것에 저항하기도 하며 뛰어난 표현성을 제시했던데 반해, 최근의 작업들은 절제되고 간결한 이미지의 구현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먹으로 그려내는 강한 선묘적 표현이 전체 화면속에서 주된 형상이나 이미지를 간명하게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석채의 활용에서 생겨나는 차분한 맛 때문이기도 하리라. 하지만 임효의 간결하지만 강한 선묘적인 표현은 그 유연한 맛이 상당한 속도감을 갖고 있고 발채(發彩)에선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역동성의 표출이라는 관점에서 조망될 수 있는데, 그것은 형상의 자연스러운 율동과 유연함으로 더욱 강조된다. 이 점은 그가 원초적인 생명과 생명 현상의 영원한 생성의 과정에 대해 끊임없이 갖고 있는 관심사에 대한 자연스러운 회화적 반응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동적인 의욕의 드러남은 다분히 회화적인 운동감과 자연스러운 연계를 갖는데, 이것은 차분하게 섞이는 색채의 운용에 의해 상당히 질서잡힌 호흡과 의식을 갖추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성긴 붓자국의 틈새 사이로 운필의 운동이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반면, 두툴두툴한 표면의 질감이 두텁게 느껴지는 색면과 색면 사이에는 허심한 구성적 요소가 배어있음이 드러난다. 우리가 임효의 회화에서 편안함이나 짜임새 있는 형식을 배제한 허허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회화로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자연주의적 태도와 세계관을 쉽게 엿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힘차고 굵은 선의 운용에 의하여 선묘의 현대적인 표현 영역으로 확장되었지만, 전체 조형의 문맥을 단순하고 소박한 전통적인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있다. 화면에서 드러나는 형상의 모습은 우리의 의식에 충격을 주는 날카로움은 없지만, 원초적인 생명과 원시적 정감을 자연스럽게 발현시켜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강하게 드러내는 그러한 형상은 다분히 반어적으로 물화된 표면질감을 갖고 있다. 그가 최근의 작품에서 그려내는 동물들은 화면을 채우는 다분히 존재론적인 주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은 화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원시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끊임없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어 매순간마다 변화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은 특히 그가 보여주고 있는 동물의 형상이 독특한 농세적 필선에 의해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독특한 것은, 그가 최근의 작품에서 단순한 형태로 그려내는 여러 유형의 동물들은 그것이 닭이건 새이건, 혹은 물고기이건간에 화면 속에서 눈의 형태가 특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눈이라는 것은 외계의 대상을 시각적으로 지각하는 최초의 감각기관인 동시에, 모든 동물의 형태 중 가장 지배적인 인상을 형성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눈이란 외계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체계로 들어오는 입구에 해당되며, 동시에 의식을 외부세계에 투영하는 출구의 역할을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의 현상이 인격화되는 범신론적인 의식에서 회화적 행위의 타당성을 찾는 임효에게 있어서 화면에서 강조되고 있는 생명체의 눈의 표현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실상과 진여를 달관하는 지혜의 반야의 상태를 지향하는 동양적인 세계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상과 형상성이 하나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투영된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생각에 이르게 된다. 임효가 지향하는 정신성이 비록 명시적인 종교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물질과 관념, 본질과 현상, 주관과 객관,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항대립적인 이분법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仙道'의 세계관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종교적인 초월의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가령, 「선인의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임효의 근작에 대해 작가 자신은 "동양철학의 심오한 이치를 설명한 주역의 음양오행을 풀어 조형화한 것으로 한국인의 생활과 지기와 해학, 천문지리 등을 풀어 세시풍습으로 1년 신수를 점쳐보는 토정비결을 근간으로 해서 인간 세상에 있는 여러 일상 중 삶을 밝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찾고자 선도의 한가지를 조형화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는 삶의 즐거움을 근거로 하고 있는 이상향이며, 이러한 낙관적인 세계관을 결코 대립되는 관념들간의 간극이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이룩될 수 없는 것이다. Ⅲ. 다분히 세계에 대한 낭만적 해석을 동반하고 있는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인간 중심의 팽창주의적 삶에 대한 거부를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지향하고 있는 삶은 세계와 나와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는 즐거움의 삶이며,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주의의 삶이 아니라 우주(자연)중심주의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삶의 공간은 비시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초시간적인 공간이 신비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런 곳이다. 이 경우 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으로서의 예술가가 제시하는 즐거움의 본령은 결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이 세계의 부정성을 최소화시키려는 인간의 생득적인 욕구인 셈이다. 이것은 곧바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생각의 방향으로 피력으로 옮아간다. 그가 사용하는 색채가 한국적인 색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당히 순화된 상태로 드러난다. 이 점은 그가 세상과 삶에 대해 자신이 내리고 있는 가치평가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보인다. 앞서 밝혔듯이, 팽창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와 세상의 순리에 합치하려는 그의 노력은 색채의 사용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가 사용하는 색채는 밝음을 주조로 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팽창의 흔적이 없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가 그의 이러한 색채의 사용을 두고 "색채로서의 물성을 순화시키거나 퇴색시킴으로써 정신성을 환원한다"고 평했는지도 모른다. 밝음과 두터움이 곳곳에 배어있는 임효의 작품은 지나친 과장이나 억지스러운 감춤이 없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걸치고 있지 않으며 성숙한 즐거움을 흔쾌하게 나누고자 하는 헐렁한 이타심을 보인다. 고요하고 밝고 아름다운 마음은 부위의 그림과 건강한 놀이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 속에 구체적인 동물의 형상들은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이 완연히 구별되지 않고 서로 삼투하기도 하고 서로 보완하기도 한다. 움직임이 없는 상태와 활발한 움직임이 있는 상태가 교착하고 자꾸 움직임이 있는 상태로 옮겨 가려고 한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 어김없이 꿈을 꾸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꿈은 다름아닌 자연과 합일된 새로운 삶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자족적이고 탄력적인 양태로 드러나는데, 그 자족성과 탄력성의 이면에 꿈틀거리는 작가의 의식을 붙잡아 들여다 보고 싶다는 욕망은 괜히 생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