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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묵미학의 새로운발견(월간미술 1999년 4월호)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1-20 16:35     조회 : 2115    


13회 선미술상을 수상했던 임효가 수상 기념으로 개인전을 연다(4. 30~5. 9 선화랑). 임효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소재들을 가지고 우리 고유의 미적 특질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가다. 새로운 감각의 기법들을 통한 은은한 형상미의 표출. 두터운 화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수묵의 깊고 담백한 맛. 그의 최근 작품들은 한국미의 근원 정서에 닿아 있다.

임효가 추구하는 미적 세계의 본질은 한국미의 근원 정서를 탐구하는 것이다. 즉물적이고 표피적인 세계가 아니라 화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감 어린 세계다. 그의 화면 속엔 그윽하고 투박한 이미지들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 맑고 그윽한 형상들은 두터움을 바탕으로 나온다. 최근의 작품들이 시사하는 성과는 아마도 수묵의 풍부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작업과정의 독창성에 있을 것이다. 그의 닥원료에 의한 수묵작업은 특별한 정서를 발산하고 있다. 그 정서는 바로 한국미술의 근원 정서들과 연결되어 있다.

임효의 최근 작품들은 수묵미학의 새로운 발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서구적 재료를 포함하여 다양한 재료들을 섭렵한 후에 다시 수묵으로 돌아왔다. 수묵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국적 미감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의 수묵화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동시에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수묵의 현대적 사용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는 “수묵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장점을 개발하여 세계적인 재료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왔다. 먹의 원리와 닥지의 특성을 연구하고, 그 성질과 제조과정을 작업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최근의 작업을 일궈냈다.

은근하고 깊은 수묵의 맛

그는 기존의 수묵작업에서처럼 운필과 선염에 의한 묘사방식을 쓰지 않고 수묵작업을 닥지 제작 공정 안으로 끌어들여 우려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종이의 바탕으로부터 우러나온 수묵의 형상들은 독특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칠하여 스며들 때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터치나 운필이 주는 느낌보다 훨씬 두텁고 자연스럽다. 은근하면서도 깊은 맛. 바로 한국적 미의식과 통하는 정서다.

그는 닥종이로 바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먹을 칠하고 먹이 마르기 전에 종이죽을 얹어서 먹이 배어나오도록 한다. 먹을 우려내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려내는’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그 반복된 우려냄은 깊은 맛을 낸다. 칠해지고 스며드는 것과 비교할 때 훨씬 깊고 맑은 느낌이다. 그 우려냄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이다. 물과 먹은 합쳐졌다 다시 분리된다. 물은 먹을 머금고 이동하여 화면의 어느 지점에 내려놓고 빠져나가 버린다.

임효는 먹이 마르기 전, 즉 물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종이죽을 얹어서 먹을 아래로부터 위로 배어나오도록 한다. 전통적인 배채법과는 다른 것이다. 그 작업을 반복하면 장맛이 우러나오듯 그윽한 먹맛이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인위적 기교는 화면 밑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순수한 형상이 생성된다. 서양의 재료에서는 물과 물감, 또는 기름과 안료가 분리되지 않는다. 서구 안료들은 수묵처럼 우려낼 수 없다. 그러므로 임효가 고안해낸 ‘우림 효과’는 수묵으로만 가능한, 고유한 정서를 발산하는 한국적 방법론이다.

그의 화면이 ‘우려내는’ 정서는 바로 우리 가슴속의 멍울진 이야기들이 그 바탕을 이룬다. 우리의 선구적 미술사가이며 미학자인 고유섭은 한국미의 특징을 ‘구수한 큰 맛’ ‘무계획의 계획’ 또는‘무기교의 기교’라고 했다. 또 한국미의 본질을 ‘자연에의 순응심리’에서 찾았다. 임효의 그림들은 바로 그런 의미들과 통하는 정서를 찾아가고 있다. 종이죽을 이겨붙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묵의 순수한 형상들은 무계획처럼 보이나 계획된 것이고, 손맛에 의해 쌓여진 종이의 흔적들은 자연의 질감 그대로의 성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종이 속에서 형태를 찾아내는 작업과 같다. 예를 들면, 그의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고목들은 묘사된 나무의 형상이 아니라 종이원료 속에서 나무의 형상을 찾아내듯 표현된 것이다. 최초의 형태는 그의 붓에서 나온 밑그림에 의해 비롯되었지만 마지막 형태는 물의 작용에 의지하여 우려낸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의 형상은 희미한 그림자와 같이 번져 있음에도 거대한 고목의 육중한 존재를 느끼게 해준다. 그는 단지 고목의 존재성만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의 삶과 정신, 정서와 미감을 담아내려 한다. 닥지로부터 우러나온 형상들이 뿜어내는 독특한 효과와 미감은 근작들에서 얻은 최대의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 마음속의 형상 하나가 자라나서 작품으로 완성되는 과정. 그 과정이 곧 임효 작업의 요체다.

그의 작업은 우리 어머니들의 장 담그는 과정과 같다. 마치 콩을 쪄서 메주를 만든 뒤 발효시켜 장을 만들듯, 그는 종이죽(닥원료)을 만들어 쌓아서 형태를 만들고 먹을 우려내어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작업은 어머니가 장을 담그듯 그렇게 정성스럽게 진행된다. 그의 ‘장독’ 속에서 숙성되어 나오는 것은 우리 고유의 정서를 함유한 투박한 화면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단순히 칠하고 뿌리고 발라서 만든 회화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그의 화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은 마치 장맛과 같다.

임효의 작업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칠하고 바르는 개념이 아니라 물들이는 염색개념의 도입이다. 치자· 소목· 홍화· 쪽물· 갈물 등 전통 염료 제작과정에 의해 염료를 직접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색채와 빛깔에서도 고유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그는 이처럼 순수한 우리 재료들에 현대적인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는 우리의 재료들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검증하고 있다. 채색효과와 질감효과에 있어서 서구의 그것과 비교하여 뒤지지 않는, 그러면서 차별화되는 조형적 탐구인 것이다.

한국미의 원형을 찾는 작업

그의 작업은 골법용필의 전통적 방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골법용필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그 실체에 다가가려 한다. 최근의 그의 작업들은 또한 지필묵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조형적 노력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해 지필묵을 사용하는 전통적 방법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 동양화의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그 원리를 이용하고 개념을 확산하며 그 원료를 해체하여 재조합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임효의 최근 작품들은 점차 우리 정서의 핵심으로 다가가고 있다. 화면은 한층 더 정제되고 절제되어 있다. 이전의 거칠고 동적인 감각이 이제 작품 속으로 스며들어 전체적인 균형감각을 찾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미 수차례의 변화를 겪어왔다. 그 변화는 본능적인 충동들로부터 나온 변화들이다. 그의 사람됨이나 작업이 충동적이란 의미가 아니고, 그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작품에 대한 열정이 변화를 충동질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10여 년 간의 변화들은 일종의 과격성과 실험의식을 동반하고 있다.

1986년 두 번째 개인전까지 그의 작업은 전통적 필묵법에 의한 산수화의 세계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90년 3회 개인전에서 그의 작업은 급변한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과감한 필치와 형상들이 신들린 듯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해체하여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오직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조형적 열망을 간직한 채 작업에 몰두했다.

이후 몇 년간의 작업들은 돌파구를 찾아 좌충우돌 다양한 실험들을 감행했던 시기로 보인다. 서구적 요소를 과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중심을 잡고 되돌아왔다. 동산방에서 열었던 6회 개인전에서 그는 한국성에 대한 새로운 의지가 담긴 닥지작업을 선보였다. 강렬한 색채작업은 이제 종이 요철작업으로 변화하여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그린다’는 개념에서 ‘새긴다’는 개념으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담백하고 명쾌한 느낌을 주는 명랑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 위에 가해진 수묵과 천연 안료의 유현하고 정갈한 색채는 그가 이미 한국미의 원형을 깊이 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작품들에서 또다시 회화적 한계를 느낀다. 닥원료에 의한 화면 제작공정 자체를 작업의 요소로 수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묵을 우려내는 독자적 방법을 개발함으로써 그 한계를 보완하고자 한 것이 최근의 작업이다. 그는 이제 재료와 기법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서정걸·미술평론>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홍익대와 동 교육대학원 졸업. 조선일보미술관·금호미술관 등에서 10회 개인전 개최. <묵림전><한국화 오늘과 내일의 전망전><동방의 빛전><한국미술의 상황전><한국미술과 프리미티비즘전><한국­네덜란드 현대작가전> 등 참가. 동아미술상·미술세계작가상·선미술상 수상.